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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윤성현 감독이 연출한 <사냥의 시간>은 가까운 미래, 경제 붕괴 이후의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 스릴러입니다. 이제훈, 안재홍, 최우식, 박정민, 박해수 등 개성 강한 배우들이 출연해, 생존을 위해 위험한 범죄를 저지른 청춘들의 이야기와 그 뒤를 쫓는 냉혹한 사냥꾼의 추격을 그렸습니다. 이 영화는 단순한 범죄 스릴러를 넘어, 시스템에 짓눌린 청춘들의 불안과 무력감을 담은 사회적 은유로 읽힙니다. 현실의 경제적 절망을 미래적 배경으로 옮겨놓음으로써, 감독은 ‘청춘의 절망’을 장르적으로 시각화했습니다. 시각적으로는 세련되고, 감정적으로는 잔혹하며, 철학적으로는 차가운 질문을 던지는 영화 —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남는가?” <사냥의 시간>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피하면서도, 시대의 불안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 문제작으로 남습니다.
붕괴된 도시, 절망이 일상이 된 청춘들의 세계
영화의 무대는 ‘가까운 미래의 한국’입니다. 화폐가 폭락하고 사회 시스템이 붕괴된 이후, 도시는 잿빛으로 물들었습니다. 거리에는 노숙자와 범죄자들이 넘쳐나고,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를 속입니다. 윤성현 감독은 이 배경을 통해 현실의 불안을 극단적으로 시각화합니다. 영화 속 도시의 풍경은 과장된 상상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사는 사회의 연장선처럼 느껴집니다. 이제훈이 연기한 준석은 이 절망의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남자입니다. 그는 교도소에서 출소하자마자 친구들과 새로운 삶을 꿈꿉니다. 그러나 그들의 ‘새로운 시작’은 도피에 불과합니다. 준석은 친구 장호(안재홍 분), 기훈(최우식 분), 상수(박정민 분)와 함께 카지노를 털어 인생을 바꾸려 합니다. 하지만 그 선택은 곧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불러옵니다. 윤성현 감독은 이들의 계획을 통해 단순한 범죄 스릴러를 넘어, 세대의 불안을 묘사합니다. 그들은 단지 ‘한탕’을 노리는 범죄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회에서 버려진 세대,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하는 청춘들입니다. 이들이 사는 세계에는 미래가 없습니다. 정부도, 법도, 도덕도 무너졌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을 속이고, 빼앗고, 도망쳐야 합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꿈은 너무나 소박합니다. 작은 섬에 가서 친구들과 조용히 살고 싶다는 바람, 그것뿐입니다. 그 소망이 더 슬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마저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초반부는 이들의 우정과 계획으로 가볍게 시작하지만, 곧 무겁고 음울한 톤으로 바뀝니다. 도시는 어둡고, 공기는 탁하며, 희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감독은 이 ‘시각적 절망’을 통해 세대의 현실을 은유합니다. 아무리 도망쳐도 벗어날 수 없는 사회, 꿈을 꾸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구조 속의 젊은이들. <사냥의 시간>은 그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영화입니다. 이들의 탈출 계획이 실행되는 순간, 관객은 깨닫습니다. 이 영화의 진짜 주제는 ‘범죄’가 아니라 ‘도망’이라는 것을. 그리고 도망은 곧 생존입니다. 세상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그들은 오늘도 달립니다. 이 폐허 같은 세계에서 이들이 쫓기는 것은 단순한 ‘사냥꾼’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시스템 자체입니다. 영화는 이 쫓고 쫓기는 구조를 통해 ‘누가 누구를 사냥하는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사냥꾼과 피사냥꾼, 끝없이 쫓고 쫓기는 과정 속에 드러난 인간의 본성
영화의 중반부터는 본격적인 ‘사냥’이 시작됩니다. 이 청춘들의 뒤를 쫓는 인물 한(박해수 분)이 등장하면서, 영화는 완전히 다른 리듬으로 전환됩니다. 박해수가 연기한 한은 냉혹하고 무표정한 사냥꾼입니다. 그는 감정이 없는 듯한 눈빛으로, 네 명의 청춘을 끝없이 추적합니다. 그의 존재는 마치 인간의 얼굴을 한 ‘시스템’ 그 자체입니다. 한은 이유를 묻지 않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건 단 하나 — ‘끝까지 잡는 것’. 이 단순한 동기는 오히려 더 공포스럽게 다가옵니다. 그는 총을 들고, 감시 카메라를 통해, 그리고 도시의 어둠 속에서 그들을 추적합니다. 이 순간 영화는 스릴러이자, 동시에 공포영화로 변모합니다. 하지만 이 사냥의 구도 속에서 윤성현 감독은 단순한 긴장감 이상의 것을 보여줍니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면서, 관객은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과연 누가 진짜 사냥꾼인가?” 준석과 그의 친구들은 분명 범죄자이지만, 그들의 동기는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반면 한은 법을 대변하는 존재지만, 그의 행동은 생명을 무자비하게 빼앗습니다. 이 모순은 영화의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정의’와 ‘범죄’, ‘도망’과 ‘사냥’의 경계가 무너진 세계. 이 안에서 인간의 본성은 드러납니다. 두려움, 절망, 생존 본능 — 그것은 결국 모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훈은 준석이라는 인물을 통해 이런 내면의 복잡함을 섬세하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꿈꾸는 청년이었지만, 점점 공포와 절망 속에서 변해갑니다. 친구를 지키려다 실패하고, 도망치다 스스로를 잃어가는 과정은 단순한 액션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해부하는 심리극처럼 느껴집니다. 안재홍, 박정민, 최우식 역시 각자의 개성을 살리며 영화의 감정선을 풍부하게 채웁니다. 이들은 단순한 조연이 아니라, 청춘의 다양한 얼굴을 대변합니다 — 순수, 유머, 분노, 두려움. 그 감정이 얽혀 만들어내는 긴장감은 <사냥의 시간>을 단순한 추격 영화 이상의 작품으로 끌어올립니다. 박해수의 존재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불안의 상징’으로 남습니다. 그는 단 한 번도 큰소리를 내지 않지만, 그의 침묵이 영화의 공기를 장악합니다. 윤성현 감독은 이 캐릭터를 통해 ‘무표정한 권력’의 공포를 그립니다. 감정 없이 규율을 집행하는 인간 — 그것이야말로 현대 사회의 가장 현실적인 괴물입니다.
희망 없는 세계에서 청춘으로 살아간다는 것
<사냥의 시간>의 후반부는 숨이 막힐 정도로 절망적입니다. 친구들은 하나둘씩 사라지고, 준석은 점점 미쳐가는 세상을 홀로 견뎌야 합니다. 하지만 이 잿빛 세계 속에서도 영화는 아주 희미한 ‘빛’을 남겨둡니다. 그것은 바로 ‘연대’입니다. 준석과 그의 친구들은 끝내 실패하지만, 그들이 나눈 우정과 약속은 남습니다. “나중에 우리, 그 섬에 가자.” 이 대사는 단순한 꿈이 아니라, 인간이 절망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희망의 언어’입니다. 감독은 그들의 실패를 통해 역설적으로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시각적으로도 영화는 뛰어납니다. 어두운 회색 톤의 도시는 냉혹한 현실을 상징하고, 붉은 빛은 폭력과 죽음을, 푸른 빛은 희미한 희망을 나타냅니다. 윤성현 감독은 색을 감정의 언어로 사용하며, 대사보다 더 강렬하게 인물의 내면을 표현합니다. 또한 이 영화는 ‘침묵의 영화’이기도 합니다. 인물들은 많이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숨소리, 발자국, 총성, 바람 소리가 감정을 대신합니다. 이런 연출은 관객을 몰입시킬 뿐 아니라, 생존의 긴박함을 피부로 느끼게 만듭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준석은 여전히 도망치고 있습니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향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가 아직 달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감독은 결말을 열어둠으로써,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질문이 남게 합니다. “그는 살아남았을까?” “아니면, 우리 모두가 여전히 사냥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질문은 <사냥의 시간>이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를 넘어선 이유입니다. 그것은 시대의 은유이자, 청춘의 자화상입니다. 불안한 사회, 붕괴된 시스템, 희망이 사라진 세상 — 그 속에서 청춘은 여전히 도망치며 살아갑니다. 결국 <사냥의 시간>은 ‘생존’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단순히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도 스스로의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일. 윤성현 감독은 말없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여전히 사냥당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끝까지 도망치는 자들이다.” 이 영화는 불편하고, 차갑고, 아름답습니다. 그 속의 어둠은 우리의 현실을 닮았고, 그 속의 희미한 빛은 여전히 인간의 가능성을 믿게 만듭니다. <사냥의 시간>은 결국, “끝까지 살아남는 자가 이긴다”는 단순한 결론이 아니라, “살아남는 과정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켜야 한다”는 잔혹하지만 진실한 메시지를 남기는 작품입니다.